고민하는 힘 - 강상중 책. 책! 책?

 

고민을 해본 적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빼고는 크던 작던 간에 고민을 해 본적 있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고민과 고민 속에서 해매며 살아가고 있고 최근에는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골치가 아프다. 이 글을 읽는 당신들도 일상에서 다가오는 고민과 고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 번 물어보자 그럼 고민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쳐다보면서 고민이 있는 것이 무에 그리 좋을까? 라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게 날 놀리는 건가하지 않을까?


우리는 나고 갈 때까지 수만은 고민과 고민 속을 해매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 태어나 별 고민 없이 왔다가 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대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더욱 사람들은 고민하는 삶을 불운한 삶과 동일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고민하는 삶이 불행하기만 삶일까? 고민 없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이런 여기서도 고민이 나온다.


저자 강상중교수는 여기서 100년 전의 인물인 나츠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의 고민함을 들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민을 읽어보려 하고 더 나아가 고민하는 방법을 알아 보려한다. 100년이란 긴 시간의 간극과 공간적인 차이도 있지만 그들이 겪었던 시대의 고민과 지금 우리가 겪는 시대의 고민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거대한 시대적 변환을 앞에 두고 개인으로 격어야 할 시대의 고민과 투쟁은 변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100년간의 간극은 적지 않은 시간이고 그들과 우리가 격어 야할 역사적 경험도 매우 다른 상황이기에 우리와 그들 사이에는 분명하게 보이는 간극이 있다. 제국주의시대의 지식인으로 격동의 시대에 살아온 나츠메 소세키와 세계종교로서 시대의 고민을 껴안으려고 했던 막스 베버를 그대로 우리에게 가지고 오기에는 그 간극이 적지 않다. 그래서 재일교포인 강상중교수의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말 그대로 재일디아스포라적인 삶을 그대로 살아온 지식인으로서의 강상중 교수의 삶 그리고 그의 모친과 그를 키워준 재일교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고민들이 100년 전 베버와 소세키가 가졌던 고민과 지금 우리들이 가진 고민들 사이의 간극사이의 다리가 되어 우리의 해결되지 않는 고민들의 실마리를 찾아 헤맨다.


우리는 항상 고민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고민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런 고민을 한다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그저 인생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는 우리의 삶속에서 대면하게 될 수많은 고민들을 외면하고 회피하기만 할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자세가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물론 이 짧은 살아감 중에서 세상과 우리에 대한 고민과 고민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삶은 올바른 삶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그런 고민들에 눈 돌리고 회피하기만 하는 자세도 그리 좋은 자세는 아닌 것 같다. 시대의 격랑 속에 떠 있는 우리가 그 흐름의 방향을 바꾸기는 힘들더라 하더라도 그 흐름에 휩쓸려 흘러가지 않으려면 자심의 위치를 찾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고민하고 세계를 고민하며 미래를 고민하는 힘이 필요 할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는 힘을 쌓다보면 언젠가는 격류에 휩쓸리는 것을 벗어나는 것 뿐 아니라 그 격류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덧글

  • 지성의 전당 2019/01/18 21:42 # 답글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고민하는 힘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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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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